트럼프에 앞서 “MAGA” 외친 ‘통합형 리더’ 로널드 레이건

트럼프에 앞서 “MAGA” 외친 ‘통합형 리더’ 로널드 레이건

트럼프에 앞서 “MAGA” 외친 ‘통합형 리더’ 로널드 레이건

Blog Article

● 보수주의의 아이콘이자 보수주의자의 롤 모델● 자상하고 도덕적이며 낙관적 성격의 기독교인● 베트남전쟁 직후 침체된 美 일으켜 세운 레이건● 레이거노믹스 뼈대 = 작은 정부, 규제 완화, 세금 인하● “진정한 적은 대기업이 아니라 비대한 정부다”● ‘전쟁 위험 감소’ ‘평화 증대’ 위해 군사력만은 증강● 전쟁 없이 냉전 끝내고 핵전쟁 공포 종식한 대통령● ‘충성’보다 ‘역량’, ‘당파성’보다 ‘국가 통합’ 중시 1987년 6월 12일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이 독일 서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연설을 마친 뒤 엄지를 들어 올리고 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고르바초프 씨, 이 장벽을 허무시오!”라고 말했다. 뉴시스 쌍용자동차 신차
미국 40대 대통령(1981~1989)인 로널드 레이건(Ronald W Reagan· 1911~2004)의 지도자로서 특징은 한마디로 '강력한 낙관주의와 신념에 기반한 리더십'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미국은 '밝은 도시'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국민에게 자신감과 희망최근대출금리
을 심어주었다. 확고한 신념의 소유자로서 자유시장경제, 작은 정부, 개인의 책임을 강하게 믿었고, 이를 바탕으로 감세와 규제 완화 정책을 밀어붙였다. '위대한 소통가(The Great Communicator)'라는 별명처럼 레이건 대통령은 대중 소통 능력이 남달랐는데, 어렵고 무거운 주제도 국민이 이해할 수 있게 쉽고 따뜻한 언어로 전달했다. 반공(反共) 한국장학재단 국민행복기금
의지가 확실했던 지도자로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이라 부르며 강력히 대응했고, 결과적으로 47년간 지속된 냉전을 종식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타협과 현실감각의 지도자로 자신의 신념을 지키면서도 필요할 때는 의회와 타협하며 실질적 결과를 만들어냈다.  레이건 대통령은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과 신앙심강원신용보증
을 바탕으로 자랐다. 어머니 넬 윌슨 여사는 아들을 자상하고 도덕적이며 낙관적 성격을 갖게끔 양육했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키웠다. 또한 "근면, 검소하고 자조적이며 도덕적 생활을 하면 커서 국가와 인류를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 될 것"이라 가르쳤다. 전통적 가치관을 중요시한 어머니를 본받아 레이건 대통령은 스스로 선택해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 그는 언제우체국 행복패키지
나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라는 낙관적 신념과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던 어머니의 교육 영향이 컸다.  ‘보수주의의 아이콘' 레이건의 신념과 정책 레이건 대통령은 보수주의의 아이콘이자 보수주의자의 롤 모델이었다. 자신이 믿는 보수주의로 미국인의 직장인대출문의
생각을 바꾸고, 1917년 이래 74년간 지속된 소련의 공산 체제를 무너뜨려 세계 역사를 바꿨다. 링컨 대통령이 미국의 운명을 바꿨다면 레이건 대통령은 세계의 운명을 바꿨다. 보수주의의 부흥을 통해 정치 패러다임을 전환한 지도자로서 레이건 대통령의 리더십은 단순히 그의 임기 8년 동안뿐만이 아니라, 이후 수십 년 동안 미국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근로자전세자금대출 연장
통상 보수주의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다양한 영역에서 나타난다.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은 전통적 가치나 제도를 보호하려고 하며, 급격한 변혁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보수주의가 어떠한 변혁도 싫어하는 수구꼴통은 아니다. 경제적으로는 자유시장경제 원칙을 중시하고,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사원리금 균등상환방식
회적으로는 종교적 가치나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려고 한다.  폴 켄고르의 책 '레이건 보수주의의 11가지 원칙'에 서술된 '인류 역사가 지켜온 11가지 원칙'은 '자유' '신앙' '가정' '인간 생명의 신성과 존엄성' '미국 예외주의' '국부(國父)들의 지혜와 비전' '낮은 세금' '제한된 정부' '힘을 통한 평화자동차할부
' '반공주의' 그리고 '개인에 대한 믿음' 등이다. 자유는 보수주의의 핵심 가치이고 신앙은 가치의 원천이다. 가정과 생명은 가치관이 담긴 그릇이다. 미국 예외주의와 국부들의 비전은 자유민주공화국의 종주국 그리고 자유의 등대인 미국 자체의 근본이다. 낮은 세금과 제한된 정부는 보수주의의 기본 정책 기조이며, 강력한 힘을 통한 평화와 반공주의는 보수주의에 기국민은행 신차대출
반한 대외정책을 강조하는 것이다. 개인에 대한 믿음과 존중은 보수주의의 기본자세다. 레이건 대통령은 줄기차게 '자유'를 외치고 또 외쳤으며 그의 모든 정책 기저에는 언제나 자유가 중심에 있었다.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의 중요한 축은 작은 정부, 규제 완화, 세금 인하인데 이 세 축 모두 자유를 진작시키는 것이다. 정부가 커질수록, 규제가 강화될수록, 세 부담이 늘어날수록 개인과 기업이 누리는 자유는 축소된다. 레이건의 외교정책은 단순히 전쟁을 예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확장을 목표로 했다.  1986년 12월 미국 워싱턴 백악관을 걷는 레이건 대통령 부부. 뉴시스 레이건 대통령은 오래전부터 미국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에 관여하고 필요 이상으로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반정부(anti-government)가 아닌 반거대 정부(anti-big government)를 추구했고, 작은 정부(small government)와 제한된 정부(limited government)가 그의 신조였다. 국민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고 퍼주기 복지로 선심을 베푸는 큰 정부, 무소불위의 정부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창했다. "진정한 적은 대기업이 아니라 비대한 정부다"라는 것이 레이건 대통령의 판단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대부분의 영역에서 정부지출을 줄였지만, 국방에서는 예외로 방위비를 대폭 증대했다. 이는 '힘을 통한 평화'라는 그의 보수주의 원칙 때문이었다. 그는 군사력 증강만이 전쟁 위험을 감소시키고, 평화를 증대시킨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군사적 열세에 있는 것은 충돌을 피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돌을 부르고 패배를 보장한다. 우리의 아들과 딸들을 전쟁에 보내지 않기 위해서 국방을 키우는 것이다."  미국 경제 호황을 이끈 9가지 극약처방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할 당시 미국은 무기력에 빠져 있었다. 경제는 경기침체와 물가상승이라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 상태에 빠져 있었고 실업률도 최악의 상황이었다. 국가와 공공기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심각하게 추락하고 있었고, 미국 국민은 전신 쇠약(malaise)에 빠져 있었다. 장장 16년간 진행된 베트남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미국의 군사력은 무기력해졌고, 글로벌 리더십은 상실한 상태였다.  레이건 대통령은 뛰어난 언변을 앞세워 국민과 소통을 중시하며,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고(Let's make America great again) 주장했다. 사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주장한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는 36년 전에 레이건이 먼저 사용한 구호였다. 레이건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공산주의 세력과 테러를 억제했으며, 미국에 대항한 거대한 '악의 제국(evil empire)' 소련을 붕괴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미국 국민에게 "모두가 자유롭고 풍요하게 살아가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비전을 제시하고, 세계인에게는 "모두가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첫 번째 비전은 자유와 번영의 길을 가로막는 미국의 큰 정부와 맞서 싸우는 것이고, 두 번째 비전은 자유와 평화의 길을 가로막는 전체주의 소련과 맞서 싸우는 것이었다. 작은 정부를 실현하고, 소련을 붕괴시킴으로써 두 비전 모두를 실현한 위대한 지도자가 레이건 대통령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1981년 2월 18일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네 가지 경제정책을 발표했다. 첫째, 1982년도 연방 예산 414억 달러 삭감을 요구했다. 이는 그동안 뉴딜정책과 민주당 정부가 추진했던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지나치게 확대된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둘째, 소득세를 매년 10%씩 3년간 모두 30%를 삭감하고, 기업에 투자 공제와 감가상각비를 허용해 투자 활성화를 유도하기로 했다. 셋째, 기업의 이윤을 축소하고 경제성장을 둔화시키는 각종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해 기업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게 했다. 넷째,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금리를 안정시키기 위해 통화 공급을 억제하자고 요구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자신의 경제개혁 프로그램을 '미국을 위한 새로운 시작: 경기회복을 위한 프로그램(America's New Beginning: A Program for Economic Recovery)'이라 했는데 이는 곧 레이거노믹스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공화당 내부에서도 많은 논란과 반대가 있었음에도 경제회복을 위해서 방만한 정부지출을 축소하고 소득세를 인하하며 정부의 규제를 완화하고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통화량 공급을 조절하는 등의 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했다. 그 결과 실업률은 감소하고 경제가 활성화하면서 상당 기간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정책의 큰 방향을 제시한 데 이어 부문별로 구체적 방향을 제시했다. 방만한 정부지출 축소와 관련해 9개 세부 항목을 제시했다. △‘사회안전망'을 유지할 것 △부수적으로 발생한 혜택을 삭감할 것 △상류층과 중산층에 대한 지원금을 감축할 것 △국가 수익 정책에 대해 재정적 제약을 적용할 것 △사용자에게 명백하게 귀속시킬 수 있는 비용을 회복시킬 것 △공공부문 자본투자 정책을 재조정할 것 △연방정부의 초과 비용과 인건비를 줄일 것 △보상 정책에 대해 적정한 경제적 기준을 적용할 것 △항목별로 구분된 복지비를 그룹 지급 방식으로 바꿀 것 등이다.  레이건 대통령이 내린 처방은 아주 간단했다.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두었고, 웬만한 권한은 위임했으며, 정부의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연방정부의 재정지출을 축소해 정부 개입을 줄이고, 감세를 통해 민간의 활력을 제고하는 등 작은 정부를 추구했다. 그 결과 연 소득 7만5000달러 이상의 고소득층이 20.2%에서 25.57%로 늘어났고, 연 소득 1만 달러 미만의 저소득층은 8.8%에서 8.3%로 줄어들었다.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2.9%에서 3.5%로 높아졌으며, 물가 상승률은 13.5%에서 4.1%로 낮아졌다. 실업률은 집권 초기 9.7%에서 5.5%로 낮아졌다. 그는 재임 기간에 1650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냈다. 배우조합(Screen Actors Guild) 회장으로 재임 중이던 40대 초반의 레이건 대통령 모습. Gettyimage 레이건이 반공주의자가 되는 과정젊은 시절 레이건 대통령은 민주당 당원이었고, 루스벨트 대통령의 연설문 전체를 외고 다녔다. 1937년부터 배우를 하면서 59편의 영화에 출연하고 민주당에 입당해 영화배우협회 회장을 두 번 맡았다. 배우이던 시절 1940년대 초반에 할리우드 내부에 공산주의 성향을 보인 인물이 점점 늘어나면서, 그는 미국 좌파가 영화계를 장악하려 소동을 부리는 것과 영화제작, 배우조합 운영, 대본 내용 등에 공산주의 이념을 퍼뜨리는 것을 실제로 목격했다. 이 소동과 목격을 통해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위험성과 실체를 인식하게 됐다. 당시 할리우드 영화인 중 일부는 소련과 공산주의에 동조하거나, 스탈린을 긍정적으로 보는 경우도 있었다.  1947년 레이건 대통령은 미국 영화배우조합(SAG) 회장으로서, 할리우드에 침투한 공산주의자 문제에 대해 하원 비밀 활동위원회(HUAC) 청문회에 출석해 증언했다. 이때 그는 "표현의 자유는 존중해야 하지만, 미국의 자유를 파괴하려는 집단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레이건 대통령은 단순한 우려를 넘어 확신에 찬 반공주의자가 됐다. 레이건 대통령은 1954~1962년 동안 전국 무대에서 반공 메시지를 퍼뜨렸다. GE(General Electric) 측과 함께 순회 강연을 다니기도 했고, GE가 홍보를 위해 제작한 TV 단막극의 주인공이었는데 그 단막극이 CBS 방송을 통해 미국 전역에 방영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 인사가 됐다. 이때 레이건 대통령은 "미국의 자유시장과 민주주의를 지키자"는 메시지를 강조했다. 이 시기에 공산주의를 경제적, 정치적, 도덕적 위협으로 보는 레이건의 관점이 더욱 뚜렷해졌다.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은 지도자로서 반공 정책을 수립하고 실천·집행했다. "소련은 악의 제국이다. 우리는 그들의 공격적이고 침략적인 이념을 막아야 한다. 자유세계가 승리할 때까지 우리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단순한 정치적 대립을 넘어 도덕적 전선까지 공산주의와 싸우는 전선을 끌어올렸다. 이는 냉전시대에 미국 국민과 서방세계의 정신적 결속을 다지는 계기가 됐다.  레이건 대통령은 강한 보수주의자였지만, 국가 통합을 매우 중시했다. 그래서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당파를 초월한 인사를 했고, 민주당 측 전문가들에게도 자주 자문했다. 의회가 여소야대로 민주당이 다수당인 상황이었던 만큼 당파를 초월한 협력(bipartisanship)도 일정 부분 시도했다. 그는 과거 민주당 당원이었던 레이먼드 도너번을 노동부 장관으로 임명했고, 폴 볼커 연준 의장은 원래 지미 카터(민주당) 대통령이 임명한 인물이었으나 유임시켰다. 진 커크패트릭도 원래 민주당 당원이었으나 유엔 대사로 임명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민주당 소속인 패트릭 모이니헌 상원의원의 사회정책 전문성을 존중해 자주 자문을 구했다.  당파를 초월한 인사정책레이건 대통령은 한번 기용한 인사는 믿고 존중했다. 카터 정부가 임명한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인 볼커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고금리 정책을 시행하자 단기적으로 기업과 부동산 등의 자산가치가 폭락하고 경기 불황이 나타났다. 레이건 정부와 볼커에 대한 비난이 급증했지만 레이건은 볼커를 끝까지 신임했다. 레이건 대통령 취임 당시 15%에 달했던 물가상승률은 차츰 낮아져 1983년에는 3%로 안정세를 유지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경제 버블을 방지하고 구조조정을 해 경제는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충성'보다 '역량'을, '당파성'보다 '국가 통합'을, '이념 순혈주의'보다 '실용적 다양성'을 더 중시했다. 그래서 그는 단순히 공화당 대통령이 아니라 미국 전체를 아우르는 '국민적 리더'가 될 수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 워런 버거 대법원장, 새로 임명된 대법관 샌드라 데이 오코너가 1981년 9월 25일 임명식 직후 대법원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Gettyimage 국민이 환호한 인사의 백미는 흑인 여성 샌드라 데이 오코너를 연방 대법관으로 임명한 것이었다. 1980년 대통령 선거 캠페인 중 레이건은 "내가 대통령이 되면, 반드시 여성을 대법관으로 임명하겠다"고 선명하게 약속했다. 이유는 단순한 '젠더 정치' 때문이 아니었고 보수적 가치를 지키면서도 시대 변화에 부응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데 있었다. 막상 대법관 후보를 찾으려 하니 보수적 철학과 법적 전문성을 동시에 갖춘 여성 후보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레이건 대통령은 오코너를 직접 만나 법에 대한 경외심, 헌법 해석에 대한 신중함, 개인적 품격과 균형감각 등을 확인한 후 "그녀는 미국 대법원을 빛낼 것"이라고 확신해 1981년 7월 7일 오코너를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법관 후보로 공식 지명했다. 일부 공화당 보수 강경파는 반대했으나 미국 사회는 폭발적 환영을 표했다. 여성계는 물론 민주당 의원들까지 모두 지지해 오코너는 상원 인준 투표에서 99대 0이라는 압도적 지지로 대법관이 됐다. ‘악의 제국' 소련 전체주의 체제를 와해시키다영국 마거릿 대처 총리가 펴낸 자서전 '국가 경영(Statecraft)'의 표지를 넘겨 안쪽을 보면 "이 책을 로널드 레이건에게 바친다. 세계는 그에게 너무나 많은 빚을 지고 있다"라는 헌사(獻辭)가 나온다. 이는 레이건 대통령이 세계의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준 것에 대한 대처 총리의 헌사다.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한 1980년대 초반에 미국의 저명한 학자들, 특히 좌파 학자들은 소련이 내부적으로 앓고 있는 본질적 문제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소련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 전망을, 그들 중 일부는 장밋빛 전망을 내놓고 있었다. 저명한 역사학자 슐레진저(A M Schlesinger)는 1982년 모스크바를 방문한 후 "거의 모든 것이 풍족했다"라고 말했고, 하버드대의 갤브레이스(J K Galbraith) 교수는 "러시아 체제가 성공을 거둔 것은 서구의 상업경제와는 대조적으로 인력을 완전히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MIT의 새뮤얼슨(P Samuelson) 교수는 1980년대 중반,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그의 '경제학' 교재에서 "30년 내 소련은 미국을 능가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하지만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 전체주의 체제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라 믿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우리는 승리하고 그들은 패배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다수 미국인, 언론, 동료 정치가들, 심지어 그의 측근 참모들도 레이건의 안목에 동의하지 않았다. 역사는 레이건 대통령이 100% 옳았음을 정확히 보여준다. 사실 공산주의 소련의 본질과 위협을 레이건 대통령보다 더 일찍 깨달은 인물은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악의 제국' 소련 체제를 무너뜨린 것은 레이건 대통령이었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그에 앞서 1923년 '공산당 당부당(當不當)'이란 글을 통해 공산 체제의 위험성과 문제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공산주의에 대해 분노했다.  1987년 12월 8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중거리핵전력(INF) 조약 서명식에서 레이건 대통령(오른쪽)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펜을 교환하고 있다. 뉴시스 1983년 3월 8일 전국 복음주의 교회 연합 연차 총회에서 레이건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모두 전체주의적 어둠을 살아가는 이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합시다. … 순진한 유화정책이나 적에게 희망적인 생각을 가진 행위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이는 역사가 주는 교훈에 대한 배신이며 우리의 소중한 자유를 부수는 행위입니다. … 저는 여러분이 핵무기를 반대하는 토론에서 오만과 무관심의 유혹을 떨쳐내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몇몇 종교지도자가 핵무기 동결 운동을 하는 것에 유감을 표하며 자신의 핵무기 정책 지지를 호소하고,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칭했다.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표현한 것에 대해 세계가 놀랐다. 이 연설은 세계 전 언론의 머리기사를 장식했다. 미국 국무부는 향후 외교정책의 기본 노선이 교회 연합 총회 연설에서 나올 줄 상상하지 못했다. 소수의 참모를 포함 몇몇 공화당 지도부도 레이건이 너무 지나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이건이 보기에 소련 전체주의는 죽어가는 시스템이었고, 냉전에서 거둘 승리가 눈앞에 있었다. 레이건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재임 중인 1987년 6월 17일 베를린 연설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서기장에게 "고르바초프 씨, 이 문을 여시오. 이 장벽을 허무시오!"라고 촉구하고, 서베를린(West Berlin) 시민에게는 "이 장벽을 무너뜨립시다"라고 외쳤다. 1961년 8월 13일에 세워진 베를린 장벽은 1989년 11월 9일 밤에 붕괴했다. 그가 베를린에서 연설한 지 2년 5개월 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지 8개월이 조금 지난 시점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레이건 대통령은 미국이 소련보다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미국을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전략 방어계획(SDI·Strategic Defense Initiative)이라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SDI는 소련이 가지고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위협으로부터 미국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 체계였다. SDI는 레이저나 인공위성을 활용해 미사일을 격추하는 것으로, 이는 당시 공상과학 영화로 인기를 끌었던 '스타워즈'에서 착안한 것이다. SDI가 실현돼 미국이 소련의 미사일과 핵무기를 파괴할 수 있다면 소련은 더는 핵무기로 자유 진영을 위협할 수 없게 된다고 보았다.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이 감당할 수 없는 군비경쟁을 통해 소련 경제를 황폐화해 악의 제국을 무너뜨리고자 했다. 그는 당시 미·소 간의 전면 핵전쟁을 방지하는 유일한 전략인 '상호확증파괴(MAD·Mutual Assured Destruction) 전략을 거부했다. 서로를 파멸시킬 수 있는 아슬아슬한 대결을 계속 끌고 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평화를 위한 여정에서 군비를 급격히 증대시켜 압도적 군사적 우위를 점하는 전략을 펼쳤다. 소련은 미국과 군비경쟁을 할 만한 경제력과 기술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레이건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 사이에 이뤄진 일련의 군축 조치는 레이건 대통령의 강요에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어쩔 수 없이 수용한 결과였다. 레이건 대통령은 '데탕트'나 '봉쇄' 같은 개념에 오래전부터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왜냐하면 데탕트나 봉쇄는 소련 체제가 미래에도 계속 존재하리라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소련과의 공존을 거부했고 '우리는 무조건 승리한다'는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봤다. 소련 공산 체제는 인간의 광기로부터 탄생한 사생아라 봤고, 인간의 본성에 반하기에 지구상에서 없어질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소련에 대한 레이건 대통령의 거친 말은 자신의 계획을 이행하는 동시에 소련을 지속적으로 압박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역사는 레이건 대통령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그는 전쟁 없이 냉전을 끝낸 대통령, 역사상 가장 진정한 핵무기 감축을 이룩한 대통령, 핵전쟁의 공포를 종식한 대통령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이 이룬 가장 큰 업적은 인류 역사에서 인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세상을 건설했다는 점이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얻은 '위대한 소통자'라는 별명 레이건 대통령은 임기 초부터 국민과 호흡하는 능력으로 언론과 워싱턴 DC의 전문가들로부터 '위대한 소통자(Great Communicator)'라는 별명을 얻었다. 배우 출신 정치인이 매우 능숙하게 적절한 어구들을 구사하는 타고난 연설가라는 사실에 모두 놀랐다. 서민적 습관, 감미로운 목소리, 거침없어 보이는 자신감, 여러 해 동안의 연기 경력 등 모든 것이 합쳐져 뿜어 나오는 그의 연설에 모든 국민이 탄복했다.  레이건이 연설가로 성공하게 된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 하나는 레이건이 글쓰기에 매우 정통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단순하지만, 일관된 자신만의 세계관을 확실히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연설 못지않게 레이건 대통령은 연설문 작성에도 뛰어났다. 글쓰기와 연설에 대한 열정은 유레카대(Eureka College)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 시절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유명한 1933년 취임 연설문을 다 외우고 다녔다. 1950년대 제너럴 일렉트릭(GE)사의 처지를 대변하는 홍보대사 시절 전국을 누비며 노동자들에게 연설했는데, 레이건 대통령은 수십 장의 색인 카드에 각각의 연설문을 적고 계속해 외웠다.  미국 역사를 통틀어 레이건 대통령보다 자신의 신념과 이념에 대한 깊은 이해와 충실함을 가진 대통령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수많은 연설 모두에서 핵심적 메시지는 매우 간단명료하고, 그 내용도 많지 않은 몇 가지 원칙과 방향에 기초하고 있다.  리처드 워슬린(Richard Wirthlin)은 1980년과 1984년 대통령선거에는 레이건의 선거 전략 책임자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 '가장 위대한 소통자(The Greatest Communicator)'에서 유권자들이 레이건 대통령을 선호한 이유를 네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유권자 각자가 스스로 레이건 대통령과 동일시했다. 둘째, 레이건 대통령은 프로그램보다는 가치에 대해 말했는데 유권자들이 그의 가치를 좋아했다. 셋째, 유권자들이 레이건 대통령을 신뢰했다. 넷째, 레이건 대통령은 자신의 믿는 바를 말했는데 유권자들이 그의 말에 진정성이 있음을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1982년 8월 19일 레이건 대통령이 워싱턴 백악관 로즈 가든에서 매사추세츠 출신 하원의장 토머스 오닐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뉴시스 대통령 취임 이후 레이건 대통령은 의회 의원들 그리고 언론과 협조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개별적으로 또는 집단별로 의원들을 수시로 백악관에 초청해 식사하고 환담했다. 그는 취임 후 첫 100일 동안 49회의 만남을 통해 467명의 의원을 만났다고 한다. 이는 전임 카터 대통령이 4년 동안 만났던 의원 수보다 더 많은 것이었다. 의회 설득에 가장 중요한 상대는 하원의장 토머스 오닐(T O'Neill)이었다. 의회에서 거대한 산과 같은 존재로 레이건의 경제개혁 정책에 반대하며 민주당 내 반대 여론을 주도하고 있었다. 취임 후 오닐 하원의장 부부를 백악관에 초청해 첫 만찬을 한 다음 날 오닐은 레이건 대통령의 정책에 반대한다며 그의 뒤통수를 쳤다. 레이건 대통령은 사사건건 심하게 반대하는 오닐 의장을 좋은 지도자로 평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기자회견 중 오닐을 비난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물과 기름의 관계였으나 각자의 퇴임 후에도 친분을 유지하며 서로에 대해 존경을 표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에서 언론과 협조적 관계를 가장 잘 유지했다. 그는 자주 그리고 정기적으로 기자간담회를 열었고, 기자들의 질문에 솔직하고 친절하게 대답했다. 기자들을 존경으로 대했다. 기자들을 만날 때는 핵심 참모들을 배석시켜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보충 설명을 하도록 해, 기자의 궁금증을 완전히 해소해 주도록 노력했다. 워싱턴포스트의 편집국장은 "우리는 어느 대통령보다 레이건에 대해 호의적이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최광 대구대 경제금융학부 석좌교수·前 보건복지부 장관

Report this page